겨울 과객이 머무는 곳, 강릉의 재발견

유난히 시린 겨울, 옴짝달싹하고 싶지 않은 몸을 추슬러 떠난 곳. 1년 전 강릉에서 마셨던 그 커피 한 잔이 그리워 꼬박 3시간을 달려갔다. 다섯 개의 달이 뜬다는 경포대를 뒤로하고 그저 커피 향에 이끌려 강릉의 깊숙한 곳으로 진진(進進).

[왼쪽] 커피항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어울리는 강릉항 풍경.
[오른쪽]1박2일 가족 체험이 가능한 선교장의 초가. 가족 여행을 떠날 때 강릉만큼 다양한 테마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도 드물지 않을까. 서울에서 3시간이니 당일치기 코스로도 충분할 테지만, 주변 지역과 연계한 코스를 짜면 더욱 신나는 곳이기도 하다. 태백산 자락에서 산나물비빔밥에 뜨끈한 숭늉을 곁들여 먹는 일, 강릉항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타고 정동진의 일출을 보는 일, 바다열차를 타고 겨울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는 일…, 이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30분 안에 현실이 되는 곳. 경포대에 뜨는 다섯 개의 달만큼이나 다양한 강릉의 풍경 중, 떠오르는 커피 도시로서 강릉과 고택에서의 하룻밤을 이번 여행의 테마로 정했다. 단위 면적 대비 커피 가게 비율이 가장 높고 커피 축제로 그 입지를 굳혀가고 있는 강릉. 우리나라 커피 1세대들이 운영하는 테라로사, 보헤미안이 커피 순례자들을 마중하는 이곳에서 술잔 아닌 차 한 잔을 기울여볼까 한다. 그리고 저녁엔 강릉 최고 부잣집인 선교장의 뜨끈한 아랫목에서 하룻밤을 묵어간다면 이보다 좋은 가족 여행 코스가 있을까.

커피 로드
앞에 슬쩍 언급했지만 강릉에는 커피만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꽤 많다. 바닷가 주변의 관광지에 생긴 커피숍에 들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다. 강릉에는 어림잡아 1백여 개의 커피 가게들이 있는데, 서울에서 흔히 보는 별다방, 콩다방과 같은 브랜드나 체인 커피숍이 아니다. 주인장의 개성 있는 커피 맛이 살아 있는 독특한 커피 가게들이다. 지금 소개할 커피 로드는 유서 깊은 커피 가게들을 일일이 꼽기보다는 이 재밌는 풍경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 것인가 고민해본 기자의 체험기다.

추억을 뽑아내는 자판기 커피
드라마 「꽃보다 남자」를 기억하는가. 여주인공인 금잔디가 남산에서 3만원짜리 커피라며 구준표에게 내민 3백원짜리 자판기 커피. 사실 별것 아닌 그 자판기 커피 한 잔에, 남산 커피 자판기는 연인들의 명소가 되어버렸다. 똑같은 남산의 야경이지만, 이상하게도 커피 한 잔 뽑아 들면 도심의 불빛이 더 예뻐 보이고 함께한 사람도 더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그뿐만 아니라, 상사에게 한바탕 깨지고도 “내가 커피 한 잔 살게”라며 동료가 데려가 뽑아준 달달한 커피 한 잔에 속이 확 풀어지는 경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자판기 커피란 지금은 거의 쓸모가 없어진 1백원짜리 동전 몇 개에 웃고 울 수 있는 몇 남지 않은 장소가 아닐까 싶다. 옛 안목항(지금의 강릉항)은 그런 추억과 낭만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1980년대부터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수십 대의 커피 자동판매기가 줄지어 있어, ‘자판기 커피 문화의 명소’, ‘효시’ 등으로 불리는 곳이 됐다.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주차되어 있는 차창 안으로 들여다보면, 꼭 맞잡은 두 손 사이에 종이컵이 하나씩 들려 있다. 서울에서는 5천원짜리 진한 에스프레소를 주문하던 ‘차도녀’도 강릉항에서는 4백원짜리 달달한 믹스 커피를 마셔야 한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맥심이냐 초이스냐, 브랜드를 선택할 수 있는 배려 정도는 갖춘 길거리 다방이니. 자판기 앞에서 한참 뭘 고를까 고민하던 사이 익숙한 듯 밀크커피를 누르는 손길이 눈에 띈다. ‘위잉위잉’, ‘톡’, ‘쪼르르’… 익숙한 기계음이 참 정겹다. 어릴 적 신기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재미삼아 어른들의 커피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끝과 코끝이 무감각해질 만큼 추운 날씨에도 어떻게 이 커피는 입에 착착 감기었는지,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을 켜듯 순식간에 확 타올랐다 사라졌다. 그게 아쉬워 자판기 커피가 싫다는 일행까지 동원해 동전이 바닥날 때까지 이 맛 저 맛 안 먹어본 커피 없이 뽑아댔다.

항구의 커피 가게
보통 바닷가, 하면 수많은 횟집을 떠올리지만, ‘강릉항의 바다’, 하면 이제부터는 커피 냄새가 먼저 날지도 모르겠다. 말발굽처럼 U자형으로 굽어진 해안선과 높은 파도, 푸르고 깨끗한 바다, 해송길이 어우려져 아름다운 강릉항은 안목항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2008년에 강릉항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는데, 지역명이야 어찌되었건 하나의 명사처럼 굳어져버린 안목항 커피 거리다. 횟집 사이사이로 솟아오른 수많은 커피 가게, 자판기 커피에 뒤질세라 커피 자동판매기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서 있다. 그 흔한 별다방 하나 보이지 않아서일까. 항구의 커피 가게는 3층짜리 큰 건물이라 해도 동네 다방처럼 친근하다. 강릉항에는 새롭게 여객터미널이 지어졌고 곧 강릉-울릉도 간 여객선이 운항된다 하니 지금처럼 조용하지만은 않겠지만 겨울 바다를 즐기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다. 놀라운 것은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핸드 드립 커피가 고작 3천원이다! 게다가 케냐냐, 브라질이냐, 에티오피아냐,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커피도 10여 가지에 이른다. 원하면 직접 드립할 수 있도록 따뜻한 물과 도구를 챙겨준다. 소소한 배려지만 의외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듯하다.

코리안 커피빈 드림
강릉의 지중해성 기후는 커피를 보관하기에 좋은 조건이다. 왕산 지역은 한국 최초로 커피나무를 상업용으로 재배하고 생두 수확에 성공해 유명해졌다. 그 중심에는 커피 농장인 커피커퍼가 있다. 왕산계곡 깊숙한 곳, 여기에 커피커퍼가 운영하는 커피 농장과 커피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펜션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덕에 동화 속 과자집처럼 풍경도 예쁘다. 본관인 커피 로스팅 하우스와 그 뒤로 이어진 커피나무 전시관은 비닐하우스 한 동 정도를 개조한 규모. 하지만 얼마전 새로운 커피 농장을 만든데다, 앞으로는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될 예정이라 하니 곧 ‘대한민국’이 원산지인 커피를 마시게 되지 않을까. 아직까지는 유통할 수 있을 정도로 수확량이 많지 않지만, 지난해에는 무려 다섯 자루나 거두어 시음회를 가졌다고 했다. 커피커퍼는 여행자들이 커피도 마시고 커피 체험도 하기 위해 들르는 경우가 많다. 커피 유물들이 전시된 커피 박물관, 커피커퍼에서 운영하는 커피숍 그리고 커피 체험 교실이 열리는 초콜릿 하우스도 있다. 생두를 가스 불에 직접 볶아 원두로 만드는 커피 로스팅 체험은 커피 초보자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프로그램. 공식 인증서는 아니지만 커피커퍼에서 발행하는 수료증도 발급해주니 어쩐지 뿌듯한 마음이 드는 체험 프로그램이다. 이날도 두 쌍의 부부가 로스팅하는 과정을 쭉 지켜보았는데, 그들의 진지한 열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밖에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초콜릿 만들기, 커피나무 심기 체험 활동도 준비되어 있어, 가족이 함께 가도 좋을 만한 곳이다.

강릉항 강릉 유람선 운항 정보
운항 시간 오전 11시, 오후 2시 30분
코스 1시간 20분 소요. 강릉항을 출발해 정동진 앞바다에서 회항하는 코스로, 남항진해수욕장, 영동화력발전소, 강릉통일공원 등을 구경할 수 있다.
요금 대인 1만5천원, 소인(12세 이하) 1만원, 4세 미만 무료 기타 강릉항에서는 연령에 맞는 선상 체험학습 프로그램(1천~1만원)을 운영 중이다. 유아 및 초등부는 바람개비 만들기, 갈매기 먹이 주기, 소망 풍선 날리기, 선상실 체험 등을 할 수 있다.
문의 033·651-5959

[아래 왼쪽]선교장의 자랑,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금강송 숲. 큰 산불이 나자 집주인이 집보다 소나무가 탈까 애를 태웠다는 곳. 이 소나무들의 나이는 평균 3백~6백 년 사이로, 선비 정신처럼 곧게 쭉 뻗은 모습이 아름답다.
[아래 가운데/오른쪽]작은 도서관인 열화당은 출판사 열화당과 이름이 같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후손이 열화당의 인문사적 정신을 잇고자 같은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평일(월~금요일), 오전 9시~오후 5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이용객이 드문 겨울에는 열람 시간이 유동적이니, 방문 전에 미리 예약 전화를 하면 개방해둔다.

총알도 피해가는 명당 집
전국에 많은 고택 체험장이 있지만, 이렇게 넓은 집을 오롯이 가질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대문에서 집까지 차를 타고 들어간다는 대저택의 모습을 이곳에서 확인했다’할 정도로 선교장은 으리으리하다. 태종 이방원의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형인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李乃蕃)을 시작으로 10대에 이르러 번창한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전통 가옥. 어디 가문의 부잣집이라며 남아 있는 대개의 고택들은 99칸의 웅장한 옛 모습들을 한국전쟁 때 잃어버렸지만, 선교장은 그 모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마당까지 포탄이 떨어졌지만 큰 피해 없이 비켜나간 덕이다. 선교장은 다른 곳과 달리 공간 대부분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는데다, 각각의 건물에서는 한과 만들기, 서예학교, 자수 체험 등 다양한 체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실로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되는 셈이다. 언젠가는 선대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손님들이 오가며 풍류와 학식을 논하던 모습을 재현하게 되지 않을까. 현재는 예약을 통해 다도와 목공예 체험 정도가 가능한 것이 조금 아쉽지만, 얼른 날이 따뜻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지금은 입구의 활래정에서 다도 체험을 하는 상상만으로도 만족하시길. 연못에 뜬 배처럼, 그림 같은 활래정의 모습은 겨울에도 탐닉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옛 이야기가 재밌는 집
그 옛날에는 이곳 인공 연못 바로 앞까지 물이 찰랑거렸을 만큼 경포호의 폭이 넓었다. 그래서 집 앞에 나루터를 두고 배로 경포호를 가로질러 건넜는데,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자 배들을 모아 다리를 놓자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그래서 붙은 이름이 배다리로, ‘선교(船橋)’란 이름은 여기에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한단다. 눈을 감고 상상해보라. 이 아름다운 경포호가 내 앞마당이었다니! 선교장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은 남자 주인의 사랑채인 열화당이다. 열화당은 현재 작은 도서관으로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는 고택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 생활 공간이자, 족보와 문집도 발행하는 출판 기능을 가진 문화 공간을 겸했던 곳. 이제는 좌식 테이블, 에어컨, 정수기도 갖춘 어엿한 현대식 도서관이 되어 옛 인문학적 정신을 잇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 열화당의 또 다른 재미는, 다른 건물과 확연히 다른 건축 양식을 구경하는 일이다. 일전에 근대 건축물을 찾으러 덕수궁 정관헌에 들렀을 때와 느낌이 비슷하다 했더니, 표지판에 그 해답이 있었다. 건물 앞으로 내어진 테라스는 이 방에서 며칠 쉬어간 러시아 공사가 그 보답으로 러시아식으로 지어준 것이라는 설명. 어떤 이는 이 테라스가 이질적이고 불편하다 평했지만, 실제로 보면 건물이 아늑해지고 여성스러워지는 데 일조했단 생각이 든다.

손님이 묵어가는 집
덕망 높은 부잣집들이 그랬듯, 선교장도 베풂의 중심에 있었다. 수많은 선비와 풍류객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길을 떠났다. 선교장 건물 중 가장 길고 크게 자리한 행랑채는 현재도 단체 체험객의 숙박 장소로 사용되는데, 작은 객실이 10개나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선교장에도 오는 손님의 수준을 평가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채는 세 단계로 구분되어 있는데, 집주인이 과객의 학문과 사람 됨됨이를 테스트해서 숙소를 배치했다. 고명한 선비는 가장 고급 사랑채인 열화당에, 학문과 식견이 있는 사람은 중급인 중사랑에, 평범한 손님은 가장 아래인 행랑채에 머물게 했던 것. 이곳에 하룻밤 머물 예정이라면 꼭 종이와 펜을 준비하길. 옛날 선교장에 묵었던 손님들은 편안한 숙식을 제공받은 답례로 그림이나 글씨를 방 안에 남겨두고, 선교장은 또 그들을 위해 표구를 해주는 것으로 성의를 표했다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긴긴 겨울밤 관동팔경을 옆에 두고 시 한 수 읊어보는 것도 꽤나 진중한 추억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