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보았던 주문진시장의 열기는 고요한 선비의 고장 강릉에 한줄기 생명력을 더한다. 시장의 열기야 어디든 마찬가지겠지만, 모든 것이 살아 숨 쉬는 활어시장은 그 정도가 더하다. 푸른 새벽을 가르며 항구로 들어서는 오징어배의 불빛이 뜨겁고, 지칠 줄 모르고 경매에 나서는 시장 상인들이 뜨겁고, 그 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호흡 역시 그러하다.

 
삼척 용화해수욕장의 풍경. 낚시를 즐기는 이들과 스노쿨링을 즐기는 이들이 그림처럼 더해진다

선교장과 오죽헌 그리고 경포대까지 품은 강릉은 고즈넉한 선비의 고장이다. 강릉을 관통하면서 이들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모두 지척에 있어 더욱 그렇다. 해안도로를 따라 만나는 강릉의 표정, 지금부터 살펴보자.

목적지 없이 달리기, 얼마만인가. 사람들은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 속삭이지만 어찌되었거나 지금은 아니다. 가슴 한켠을 차지하던 고민거리 하나 둘, 길 위에 던져본다. 지금 이 순간은 한번뿐이니까. 오늘 날짜는 일년에 한 번씩 돌아올 것이고, 이 시간은 24시간에 한 번씩 돌아온다. 하지만 지금 여기의 이 시간과 공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니 충분히 만끽해보자. 미래에 대한 고민은 잠시 미뤄두고 현재에 충실하자. 적어도 길 위에 있는 지금만큼은. 길 위에서의 시간은 무언가를 찾아나선 여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줄 것이다.

차분한 선비의 고장에 멈춰서다, 강릉

[왼쪽]관동(강원도)지방의 뷰 포인트를 모은 관동팔경의 하나인 강릉 경포대. 경포호와 태양이 닿는 모습이 끝내준다고. 장마철 뿌연 모습이 아쉽다
[오른쪽]강원도지방유형문화재 6호인 경포대의 내부. 강릉 오죽헌에 있던 율곡이 10세 때 지은<경포대부>를 판각해 걸어두었다. 제일강산(第一江山)은 주지번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경포대에 오른다. 지척의 경포 해수욕장도 유명하지만 그래도 경포대가 먼저다. 관동팔경의 하나이기도 한 경포대에서 바라본 경포호의 낙조는 감히 글자로 설명할 수 없다. 달이 뜬 고운 모래사장과 병풍처럼 바다를 감싼 소나무숲이 운치를 더한다. 경포대는 1326년 고려 충숙왕 당시 인월사 옛터에 창건되었다. 1508년(중종 3)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경포대에서 내려와 선교장으로 향한다. 조선후기 전형적인 사대부 저택을 오롯이 보여주는 선교장은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소로도 사랑받고 있다. 2011년 8월, 현재 KBS에서 방영중인<공주의 남자> 촬영준비로 부산스럽다. 가만, 드라마에서 경혜공주가 혼인 후 궁에서 쫓겨나 들어간 집이 바로 선교장이다.

[왼쪽]강릉 지방의 명문인 이내번(李乃蕃)이 처음 살기 시작해 대대로 후손들이 거처하는 집. 열화당(悅話堂)·안채·동별당(東別堂)·활래정(活來亭) 등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대문 밖 선교장 입구 연못에 세워진 활래정. 연못을 가득채운 연꽃이 눈길을 끈다

선교장은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이다. 전주사람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었다.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해 붙었다.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주인남자의 거처였던 열화당(悅話堂)은 작은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대문 밖 바깥마당 남쪽의 넓은 인공연못에 자리한 활래정(活來亭)은 나무다리가 복원되어 연못위 작은 섬까지 이어진다. 꽃과 열매가 함께 열린다는 연꽃을 대신해 연잎이 활짝 폈다.

손님이 찾아 들면 가장 귀한 손님은 주인 남자의 거처인 열화당에, 보통 귀한 손님은 중사랑채에, 별 볼일 없는 객식구는 행랑채에 묵었다. 최고 귀한 손님 중 러시아 공사관 관련자도 있었다. 열화당 앞에 자리한 러시아식 테라스가 그 증거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융숭한 대접에 대한 답례로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21세기 현대인은 한옥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중사랑채와 행랑채에 묵을 수 있다.

[왼쪽]1815년 건립된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인 열화당. ‘일가친척이 이곳에서 정담과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뜻을 품고 있다. 건물 앞 테라스는 조선 말기 러시아풍들 보여준다. 이곳에 머물고 간 러시아 공사관에서 답례로 지어준 것이다
[오른쪽]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의생가이자 체취가 스며있는 오죽헌. 한국 주택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율곡 선생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선교장과 함께 강릉을 대표하는 쌍두마차 오죽헌(烏竹軒)으로 향한다. 신사임당과 그의 아들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그야말로 위대한(?) 공간이다. 조선 성리학이 탄생한 곳으로 보는데도 이유가 있는 것.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남자가 장가를 들었답니다. 장가를 들어서 신부의 집에서 큰 아이가 장성할 때까지 머물곤 했지요. 율곡 이이가 6살이 되던 해 강릉에서 한양으로 이사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때 율곡의 큰 형, 그러니까 신사임당의 큰아들이 18세였으니까요. 조선초까지만 해도 외손자에게도 제사를 부탁하는 의미로 재산을 물려주었지요.”

율곡 선생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와 정조대왕의 친필이 음각된 어제각 등 역사적 의미를 지닌 건축물이 가득이다. 유물전시관 신축공사로 향토문화관은 들어갈 수 없다. 강릉시립박물관에서 살펴보면 된다.

강릉에서는 어쩔 수 없다. 머무르면 볼 수 밖에. 출출하다면 초당 순두부 한 그릇 맛보자. 밍밍하면서 투박한 맛이 어째 선비스러운 것은 왜일까. 정동진에서 강릉의 무게는 훌훌 털어버리자. 강릉에 속해있지만 어째 강릉 같지 않은 정동진에서 추억의 드라마 <모래시계>를 떠올리며 한 박자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강원도 동해안의 끝자락을 품다, 동해&삼척

[왼쪽]7번국도위의 풍경. 강릉에서 동해를 향한 길 위에서 만난 풍경. 가끔씩 보여주는 이런 모습 덕분에 500km가 넘는 길이 지루하지 않게 펼쳐진다
[오른쪽]관동팔경의 하나 삼척 죽서루에 오른다. 수풀에 가려 오십천은 잘 보이지 않으나 죽서루 주변을 잘생긴 기암들이 받쳐주고 있다

동해에서 삼척으로 향하는 길은 정말 아름답다. 제주도에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바닷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옛길 대신 새길을 택했을 경우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삼척 죽서루에 잠시 들른다. 얼마나 좋길래 그 시절 양반들이 손에 꼽는 장소가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죽서루 2층에 오르자 삼척시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본다. 수풀에 가려 시야가 막힌다. 오히려 죽서루 주변의 기암이 더 눈길을 끈다. 어찌되었건 가만히 앉아 망중한을 즐기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다시 길 위에 오른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동해바다가 길동무를 자처한다.

[왼쪽]삼척항에서 맛보는 달큰한 오징어물회. 생물 오징어를 사서 인근 가게에 가면 약간의 돈을 받고 물회 양념을 가져다준다. 씹지 않아도 술술 넘어간다
[오른쪽]7번국도위에서 해가 반짝 나자 숨어있던 해수욕장들이 반짝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어디인지도 모르고 들어간 용화해수욕장. 아담하지만 찾는 이들이 많다. 요즘은 투명카약 체험 프로그램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아무래도 사람이 덜 하지 않을까 싶어 삼척항에 멈춘다. 싱싱한 오징어회를 양념장에 비벼 시원한 육수에 말아 훌훌 마실 생각이 간절하다. 뱃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장마로 값은 올랐지만 오징어는 다른 양념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달다. 동해안 푸른 바다를 헤엄치던 오징어로 해수욕을 대신하려는 것일까. 풍광에 취해 멈출 수 밖에 없어 들어선 곳이 용화해수욕장이다. 아담한 모래사장에 사람이 가득이다. 투명카약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끈다고 했다. 가족단위의 휴가객들이 가득이다. 바닷물은 맑다. 한쪽 뚝방에서는 낚시꾼들이 또 한쪽에서는 스노쿨링을 즐기는 이들이 보인다.

7번국도의 배꼽, 경북 울진이 가까워진다. 이제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도 경계가 달라질 것이다. 바다는 점점 짙어지고 길 위에서의 시간은 점점 줄어든다.